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5세 (문단 편집) === [[백년전쟁|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다 === 야심찬 젊은 국왕은 프랑스의 지배권을 원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존 올드캐슬이 이끄는 [[롤라드파]][*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난 [[존 위클리프]]의 종교개혁 운동.] 인물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들이 국왕에 대해 반란을 꾸민 것은 사실인데, 사실 음모는 진행되지도 않았고 계획도 완전히 엉터리였다. 게다가 헨리는 [[스코틀랜드 왕국|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제임스 1세]]를 [[런던 탑]]에 포로로 억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즉위했을 때가 한창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백년전쟁으로 투닥대던 시기라, 그는 왕위에 오르고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군과 치고받으며 지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Jean sans Peur/John the Fearless)이 이끄는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 공작 샤를이 이끄는 아르마냑파[*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아버지 루이 1세가 용맹공 장에 의해 암살당한 이후, 샤를의 장인인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 7세가 불과 14세의 나이로 작위를 승계한 어린 공작을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지원하며 파벌의 핵심인사로 떠올랐기에 파벌의 명칭이 아르마냑파로 굳어졌다. 양측의 대립이 루이 1세 생존시부터 있었던 일이기에 이 시점의 파벌까지도 소급하여 아르마냑파라고 부르기도 한다.]가 실권을 두고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대립이 격화되어가는 와중에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이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국내의 혼란은 지속되었다. 양 파벌은 서로를 누르기 위해 심지어 잉글랜드의 헨리 5세에게 손을 벌리기까지 했고, 헨리 5세는 이러한 대립을 잘 이용하여 장차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얻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1413년에 아르마냑파는 수도인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 전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부르고뉴를 침공하여 공작을 폐위시키겠다"고 주장했고, 헨리는 이들 양쪽과 협상을 진행했다. 먼저 1414년에 부르고뉴 공작 장이 보낸 대리인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헨리 앞에서 가스코뉴와 앙구무아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대가로 영국 병력 2천명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헨리 5세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다. 한편 아르마냑파의 사절단에게 헨리는 "신붓감으로 샤를 6세의 딸인 [[카트린 드 발루아|카트린]]을 보내고, 천만 크라운의 [[지참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아르마냑파는 "공주와 장 국왕의 몸값 잔액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으나, 헨리 5세의 요구는 점점 더 커졌다. 헨리는 마침내 아키텐과 노르망디, 앙주와 푸아투, 멘, 퐁티외까지 내놓으라는 요구를 하였다. 그러자 협상은 결렬되었다. 헨리 5세는 곧바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1414년 11월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를 통하여 헨리는 의회의 열렬한 지지와 군자금을 지원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잉글랜드 곳곳에 사람을 파견해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성직자들과 부유한 [[젠트리]], 요먼들이 헨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헨리 5세는 이 군자금을 훗날 거의 다 갚아주었다. 헨리의 군대는 6천 명의 장궁병과 2천 명의 중기병으로 구성되었고, 창기병과 검병을 포함한 중보병, 65명의 포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판금 갑옷은 밀라노와 뉘른베르크 수입산이었다.[* 당시 중세 유럽에서는 밀라노와 뉘른베르크가 갑옷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국왕은 신선한 고기를 확보하게 위해 소와 양을 항구까지 몰고 간 다음 즉석에서 [[도축]]하였다고 한다. 총 1,500척의 함대가 집결되었다. 헨리는 출정 직전 마지막으로 후방을 안정화하기 위해, 자신의 암살 음모에 가담한 케임브리지 백작, 토머스 그레이 경, 스크로프 경, 올드캐슬 경을 처형했다. 그리고 1415년 8월 11, 헨리 5세는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에 상륙했다. 그들은 아르플뢰르라는 항구도시에 상륙했다. 헨리는 아르플뢰르를 발판삼아 [[노르망디]] 지방을 정복하고 파리로 향할 생각이었다. 헨리는 정면 공격은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해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그는 육지엔 도랑을 팠고 해상엔 함대를 주둔시켜 보급을 차단했고, 땅굴을 파내어 폭약으로 성벽을 난타했다. 결국 아르플뢰르는 오지 않는 지원군을 기다리다 지쳐 항복했다. 상당히 오랜 기간을 버티면서 선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친 국왕 샤를 6세는 지원군을 주지 않았다. 몇 개월간 치열한 [[아르플뢰르 공방전|공방전]]을 벌인 터라 잉글랜드군은 지쳐 있었지만, 헨리는 머뭇거리면서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당장 군대를 출격시킨 다음, 센 강을 따라서 칼레까지 진군하겠다"고 공언했다. 이것은 260km에 달하는 긴 행군이었다. 국왕의 자문관들이 필사적으로 반대했지만 헨리 5세가 계획대로 밀고 나갔다. 헨리 5세는 예전의 잉글랜드 왕들이 그러했듯이 경로에 있는 모든 마을을 다 부수고 다 태우면서 진격하고 있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잉글랜드군이 신나게 불을 질러서, 프랑스 국토는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헨리의 군대는 주둔지 반경 100km를 완전히 초토화시킨 적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불길이 없는 전쟁은 머스타드가 없는 소세지나 다름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용맹공 장에게 자신이 정당한 프랑스 왕위의 상속권을 가진 자임을 주장하며 그에게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용맹공 장은 처음엔 잉글랜드군과 결탁하고자 하는 조짐을 보였으나, 일단 아르마냑파와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과 아르마냑파가 주도하는 프랑스군이 충돌, 그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가 발발했다. 이 시점에서 프랑스의 잉글랜드군은 6천 명이 채 되지 않았고, 진이 쭉 빠져 프랑스에게 언제 쓸려나갈지 몰랐으나, 헨리 5세의 지략과 프랑스군의 성급함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헨리는 프랑스군 포로를 모조리 학살하도록 지시했으며, 자신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간신히 생환할 수 있었다. 한편 아쟁쿠르 전투로 인해 사망한 프랑스군 지휘관 중에는 용맹공 장의 동생들도 있었으나, 정작 용맹공 장 휘하의 부르고뉴군은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때 아쟁쿠르에서 헨리가 포로 학살을 지시하자, 잉글랜드군 기사들과 병사들조차 탐탁치 않아 망설일 정도였다. 결국 그는 엄선한 200명의 궁수에게 이 일을 맡겼고, 포로들은 전부 살해당했다. 포로들을 단검으로 찌르고 망치로 머리통을 박살냈으며, 확실하게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배를 검으로 찌르기도 했다. 심지어 포로를 오두막에 전부 몰아놓고 불을 질러 집단 화형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은 중세 기준으로도 굉장히 잔혹한 처형에 속했다. 아무튼 아쟁쿠르에서 헨리가 포로를 처형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그는 아직 남아있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두려워했고, 잉글랜드군이 사로잡은 프랑스군의 숫자가 너무 많아 어떻게든 처리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리 5세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프랑스군 고위 포로들을 저녁 식사 자리에 불러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군의 일반 병사들은 값나가는 물건과 소지품을 모조리 털렸다. 잉글랜드군은 소수의 부유층만을 남기고 가난한 자와 중상자는 모조리 목을 그어 죽여버렸다. 이후 헨리 5세는 동생인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에게 명령을 내려 프랑스와 [[제노바 공화국|제노바]]의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외교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를 갈라놓아 프랑스를 고립시킨 뒤, 1417년 다시 프랑스로의 원정을 재개했다. 1만 명의 병력이 본국으로부터 증원되었고, 헨리는 노르망디로부터 프랑스 내륙으로 차근차근 진격해 나갔다. 아르마냑파는 아쟁쿠르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헨리 5세의 앞에서 프랑스군은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캉이 첫 번째 목표였고, 항복을 거부한 대가로 시민들은 학살되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린이까지 전부 장터로 몰아넣은 잉글랜드군은 2,000명의 시민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살아있는 자가 없었다. 이날 장터에 없었던 사람들도 강간과 약탈을 당해야만 했다.([[2차 캉 공방전]]) 캉의 운명을 보자 바이외는 곧바로 굴복했다. 코탕탱과 에브뢰, 쉘부르도 전부 정복되었다. 알랑송도 헨리 5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헨리는 점령지에 행정관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6월엔 상황이 더 나빠졌다. 루비에르가 정복되었고, 헨리는 루비에르의 포로들 중 자신의 막사에 포탄을 명중시킨 프랑스군 포병 8명을 끌고와 전부 목을 매달아 버렸다. 어떤 문헌에 따르면 헨리는 심지어 프랑스 포로를 고대 로마식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서 처형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퐁드라르슈도 함락되었고, 곧이어 노르망디의 마지막 도시인 [[루앙]]이 잉글랜드군에 의해 포위되었다.([[루앙 공방전]]) 헨리는 느긋하게 포위망을 차리고 루앙의 항복을 기다렸다. 드디어 루앙 시민들은 고기가 다 떨어져 말고기를 먹고 생쥐를 먹었으며, 썩은 음식과 풀까지 뜯어먹었다. 이때 루앙의 프랑스 수비군 사령관 알랭 블랑샤르(Alain Blanchard)는 식량을 아끼기 위해 가난한 시민들을 전부 성 밖으로 내쫓았는데, 쫓겨난 루앙의 시민들은 잉글랜드군 진영으로 찾아와 항복했으나, 헨리는 비정하게 그들의 항복을 거부하며 쫓아낸 다음 이들이 모두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잉글랜드군조차 루앙 시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동정해[* 특히 쫓겨난 루앙 시민들은 여자와 아이들이 많았다.] 빵을 주려고 했으나 헨리는 이조차 막았다. 결국 쫓겨난 루앙 시민들은 겨울이 와서 굶주림과 추위로 굶어죽거나 얼어죽어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다. 이 시기 루앙의 모습은 비참했다. 존 페이지라는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어미가 죽었는데 아이는 죽은 줄도 모르고 젖을 빨고 있었으며, 시민들은 거리에 널부러져 숨을 쉬다가 소리 없이 죽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1명이라면 죽은 자는 12명에 달했다. 마침내 루앙이 항복했다. 헨리 5세는 도시에 입성해 대성당에서 하느님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다. 물론 항복해온 수비대 사령관 알랭 블랑샤르와 프랑스 수비대는 전부 처형되었다. 이때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는 다시 내부 항쟁에 돌입해 있었다. 아르마냑파는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로 인해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으나 파리의 지배권은 여전히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 7세에게 있었고, 부르고뉴파는 라이벌인 아르마냑파를 찍어누르고 프랑스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헨리 5세는 이들의 분쟁이 더욱 격화되도록 교묘히 유도하여 그들이 힘을 합쳐 자신에게 대항하는 것을 막으며, 프랑스군을 각지에서 격파, 점차 남진하여 파리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헨리는 이제 노르망디 전역의 지배자였고, 파리의 코앞에 도달했다. 샤를 6세의 정신병은 너무 심해져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샤를 6세의 네 왕세자는 어려서 일찍 죽거나 병사했고 유일하게 남은 아들은 샤를이라는 이름의 소심한 젊은이였는데([[샤를 7세|도팽 샤를]])[* 8번째 자식이다. 동생이 1명 있었으나 어려서 일찍 죽어서 형제자매들 중 사실상 막내였다.] 아무리 봐도 왕 자질이 없었다. 1418년, 부르고뉴군이 폭동을 일으켜 파리를 무력으로 탈취했고 라이벌인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 7세가 부르고뉴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샤를 6세의 아들이자 원래 왕위계승권자인 도팽 샤를은 원래 부르고뉴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살아남기 위해 파리를 떠나 시농으로 도피했다. 이후 도팽 샤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맹공 장에게 회담을 신청했고, 몽트로 다리에서 양자가 회동하기로 약속이 맺어졌으나, 회담 장소에서 용맹공 장이 도팽 샤를의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1419년). 이에 격분한 용맹공 장의 아들 [[선량공 필리프]]는 잉글랜드군과 연합하여 도팽 샤를을 적대하게 되었고, 따라서 파리 역시 헨리 5세의 세력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1420년 5월, 헨리 5세는 샤를 6세와 트루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샤를 6세의 딸이자 왕세자 샤를의 누나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샤를 6세의 뒤를 잇는 프랑스 왕위계승자이자 프랑스 왕국의 섭정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병약한 샤를 6세가 죽으면 젊고 튼튼하고 강골인 헨리 5세가 프랑스의 국왕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샤를 6세는 헨리 5세보다 나이도 많고 병약했기 때문에 헨리 5세로서는 샤를 6세만 죽으면 자신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왕이 될 거라고 여겼다. 비록 도팽 샤를(훗날의 승리왕 샤를)과 그를 지지하는 아르마냑파가 트루아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반항하고 있었지만, 프랑스 내의 다른 주요 파벌인 부르고뉴파는 헨리 5세의 즉위에 찬동하고 있었고 헨리 5세 본인이 이미 아쟁쿠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프랑스 포로들을 대부분 학살하여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커질 가능성을 미리 차단해 놓았기에 명분으로나 실력으로나 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명백한 운명처럼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